아리수는 고구려 때 한강을 일컫던 말로, 광개토대왕 비문에 남아 있는 흔적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 · 고구려연구재단 · 고구려연구회가, 어원에 대하여는 한글학회가 인정하고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아리수(阿利水)’는 “광개토대왕이 ‘아리수’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왕이 남녀노예 1천명과 가는 삼베 옷 1천 필을 바치고 영원히 신하가 되어 고구려를 섬기겠다” 는 내용임.
- 여기에서 아리수는 순 우리말이며, 한강의 옛 이름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는 것이 현재 학계의 중론임.
- 「일본서기」에 보이는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는 광개토대왕비에 보이는 ‘백제 도성하의 아리수’ 또는 ‘경주의 알천’으로 보기도 하며, 막연히 ‘강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보기도 하는 등 분명치 않으며, 「일본서기」는 신뢰성에 문제가 많이 제기되고 비판 또한 적지 않게 받고 있음.
- 따라서 식민지적 관점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며, 아리수(阿利水)와 임나일본부설과는 관련이 없음.
[2004.9.8]
고구려연구회
- 석문 대비표 (임기중 편저 [광개토왕비원석초기탁본집성])를 보면 명백해 짐. 일본군 스파이 ‘사카와 카케노부’가 중국에서 가지고 간 탁본(사실 그것은 탁본이 아니라 쌍구가묵본이라는 가공품이었음)에 ‘아피수(阿被水)’라고 잘못 가공한 것을 그대로 읽었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이 1880년부터 1919년까지는 모두 ‘아피수’라고 읽었음.
-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 일반적인 정식의 탁본이 아니라, 임의로 문자를 판독한 뒤에 「비문」에 종이를 대고 문자의 테두리를 그린이후 문자의 바깥쪽에 먹물을 칠하여 가공한 것
- 이와 같은 입장에서 「비문」연구의 시작은 「비문」에 대한 왜곡을 낳았음. 즉 일본인들의 의도대로 변조하고, 일본인의 구미에 맞추어 해석하는 방식이었음. 「비문」이 변조되었다는 것은 1972년 재일교포 사학자인 이진희에 의하여, 일본참모부에서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글자를 새로 새겼다는 비문변조론이 발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음.
- 그러나 1919년 일본 학자들이 현장에 가서 확인한 뒤부터는 모두 ‘아리수(阿利水)’라고 읽고 있음. 그 뒤 한국, 중국, 일본의 모든 학자들이 모두 아리수라고 읽었고 전혀 이견이 없음.
- 또한 고구려 사료 가운데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광개토태왕비임, 그 어떤 사료보다 우선되며 일본서기의 기록과 비교할 필요가 없음.
[2004.9.20]
고구려연구재단
- 아리수는 고구려시대 한강을 칭하는 용어로 보고 있음,
광개토대왕비문의 정복기사 중 6년 병신년 (丙申年)의 백제공격내용 「일본서기」 권9에는 아리수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음. 다만, 「일본서기」 권9에는 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란 이름이 나오며, 이에 대해 일본학계에서는
① 신라 경주의 알천이라 보는 설과 ② 광개토왕 비에 나오는 아리수와 같은 강이라고 보는 설로 나뉘어 있음 - 삼국사기 백제본기 3개로왕 21년 9월초에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기사와 같은 내용의 기사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한강을 욱리하(郁里河)라고 적어 놓았고, 이에 대해 이병도교수가 이를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아리수이며 한강을 가리킨다고 비정한(옛 지명이나 고유명사를 현대의 지명이나 고유명사로 바꾸는 것)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병도역주. 국역삼국사기 P393 주6)
[2004.8.13]